자랑스러운 고려인 청소년들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재단법인 고려인의꿈이 함께합니다.
(재)고려인의꿈 / Dream of ethnic Koreans in CIS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 연해주로 이주한 초기 고려인의 주거 모습. 1895년 러시아황실에서 편찬한 박물학서적 《다채로운 러시아》에 실린 삽화다. (사진 제공=김병학 고려인연구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고려인에 대해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국가(CIS)에 주로 거주하면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 동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들의 역사는 1864년 이후 연해주 시대부터였다. 이들 대부분은 탐관오리의 폭정과 가난을 피해 국경 너머 러시아 땅으로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전까지 연해주를 터전 삼아 신천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1910년 국권 상실 뒤에는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시내 바부르공원 내에는 양국 간 우정을 상징하는 ‘서울공원’이 있다. 한국의 전통정원으로 꾸민 8,067㎡ 규모의 이 공원은 현지 고려인들의 요청으로 2012년 12월 서울시가 착공해 2014년 5월 준공됐다.
이어 2017년 7월 이 공원에는 상징적 기념비 하나가 더 들어섰다. 고려인들의 우즈베키스탄 정착 80주년을 맞아 서울시가 기념비를 세우고, ‘고려인 이주 80주년을 즈음하여 고려인들을 따뜻한 친구로 맞아준 우즈베키스탄 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는 글귀를 한국어와 우즈베크어, 러시아어로 조각했다.
높이 4.4m, 너비 2.2m 규모의 기념비는 이곳에 처음 정착한 고려인 가족에게 우즈베키스탄 가족이 전통빵(non, 리뾰쉬카)을 건네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 위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거칠게 질주하고 있다. 특히 열차에는 1937이란 숫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소련시절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던 1937년을 뜻하는 고려인 최대 수난의 숫자다.
“1863년 한인가족 12가구가 국경을 넘어 우리 땅으로 이주해 왔다. 그들은 1860년대부터 자신들을 고구려, 또는 고려사람을 뜻하는 ’까우리(Kauli)‘로 불렀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프르제발스키(Przhevalsky, Nikolai Mikhailovich)는 1960년대 말 연해주 한인정착지 방문기를 통해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 속의 주인공들이 바로 1937년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첫 조상이다.
또 1908년 연해주 고려인들이 창간한 ‘해조신문’에 따르면 1860년대 중반까지 한두 가구씩 두만강 국경을 넘었던 고려인들이 1867년 500명, 1868년 900명 등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차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869년에는 무려 6,350명이 연해주로 이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20년대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사회는 20만 명 이상의 큰 도시로 발전했다. 때는 일제강점기 시절로 고향과 나라를 잃은 설움이 컸던 시기였다. 그들은 깊은 상실감 속에서 연해주 지역에 ‘신한촌’(新韓村)이라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만들며 민족 정체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기관과 언론기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1930년대엔 고려극장을 비롯한 여러 문화시설까지 만들었다. (글=조철현 기록문학가)
(글=조철현 기록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