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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려인의꿈 / Dream of ethnic Koreans in CIS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던 연해주의 대표적 사회운동가 김 아파나시(한국명 김성우)의 아들 김 텔르미르 씨. 그가 국내 언론에 밝힌 울분 한 토막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1935년 스탈린 정권의 오판으로 사형된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토해냈던 그의 서러운 말 한 마디에 디아스포라 이산(離散)의 한이 오롯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나의 부친은 하바롭스크에 묻혀 있다. 어머니는 (러시아) 크림주 옙파트라시에, 외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미르자촌에, 그리고 친할아버지는 연해주 수하놉카촌에, 외할머니는 타슈켄트주 사마르스코예촌에, 친할머니는 (카자흐스탄) 침켄트시에, 형님은 연해주 크라스키노촌에 안치돼 있다. 그러니 이 고인들을 누가 모셔서 성묘할 것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고려인들의 이 같은 비극은 1937년 9월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서 비롯됐다. 망명 작가 한진은 소설 <공포>에서 강제 이주가 시작되던 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1937년 가을, 소련 연해주 조선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모두 승객이 되었다. 수십만 명이 동시에 기차를 탔다.(중략) 어디로 무엇 때문에 실려 가는지도 몰랐다.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지 못하고 다 고향에서 쫓겨났다. 차에서 태어나는 애도 있었다. 그것들은 나서 귀신들이 물어갔다.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필요 없었다. 이 세상에 왔다가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오직 어머니 가슴속에 피멍울만을 남기고. 많은 노인들과 어린것들이 철도 연변에 묻혔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이주 열차는 한 달 만에 그들을 중앙아시아에 내려놨다. 50량씩을 이어붙인 120여 대의 열차로 이곳까지 실려 온 고려인 수는 17만 2,000명가량. 그중 9만 5,000여명이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7만 7,000여명이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했다.

“1937년 8월 21일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이날 소련은 원동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라는 긴급 비밀명령을 하달했다. 원동지방에서 일본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임을 내세웠다. 일제에 대항해 싸워온 고려인들이 오히려 일제의 앞잡이로 매도되어 피땀 흘려 개척한 땅에서 쫓겨나는 수모와 고통의 장정(長程)이 시작된 것이다.”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2013, 주류성)의 저자 김호준은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은 국가이익 앞에서 소수민족의 삶과 인권을 철저하게 무시한 소비에트 역사의 대표적 수치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제이주의 결정문이 세계에 알려지면 규탄과 비판에 직면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결정문을 크렘린 문서고에 넣고 잠가버렸다고 비판했다. 그 뒤 반세기가 넘도록 실체를 드러내지 않던 이 비밀문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에야 공개돼 전 세계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글=조철현 기록문학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이주 경로 (디자인=이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