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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려인의꿈 / Dream of ethnic Koreans in CIS

고려인 문학

‘일본 제국주의의 무지한 발이 / 고려의 땅을 짓밟은 지도 발서 오래이다. / 그놈들은 군대와 경찰과 법률과 감옥으로 / 온 고려의 땅을 얽어 놓았다. / 칭칭 얽어 놓았다-온 고려 대중이 입을 눈을 귀를 손과 발을. / 그리고 그놈들은 공장과 상점과 광산과 토지를 모조리 삼키며 / 노예와 노예의 떼를 몰아 채찍질 아래에 피와 살을 사정없이 글어 먹는다. / 보라! 농촌에는 땅을 잃고 밥을 잃은 무리가 / 북으로 북으로, 남으로 남으로, 나날이 쫓기어 가지 않는가.’

이 글은 1928년 8월 일경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망명한 조명희(1894~1938)가 1930년 ‘조생’이란 필명으로 쓴 시 <짓밟힌 고려> 일부다. 연해주 청년들의 피를 끓게 만든 이 시의 영향은 컸다. 뒷날 레닌기치와 고려극장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했던 정상진 등 많은 문청들이 이 시의 영향 아래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를 발표했던 조명희는 이 희곡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 순회공연이란 기록까지 남겼다. 이어 1924년 상재한 《봄 잔디밭 위에》 또한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이란 평가를 받으며 그는 일찍이 한국 근대문학의 선각자로 우뚝 섰다. 그런 만큼 그의 연해주 망명은 문단 안팎의 큰 화제였고, 그를 맞은 고려인 지식 사회의 환호 역시 대단했다.

이후 그는 연해주에 머물며 장편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와 <만주 빨치산> 등을 집필하며 문청들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강태수, 리시연, 문금동, 최영근, 김부르크 등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하며 1930년대 중반 ‘고려인 문학’의 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 역시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시점과 맞물리며 1938년 5월 연해주 이국땅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주의의 압제를 피해 망명했던 그에게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웠던 것.

비평가들은 연해주에서 태동한 고려인 문학사의 형성기를 1937년 강제 이주 때부터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시기까지로 잡는다. 이 시기 조명희의 영향을 받았던 문청들이 '카자흐스탄에서 복간된 한글신문 ‘레닌기치' 문예란을 통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1954년부터 1969년까지는 고려인 문학의 발전기다. 이 시기 역시 조명희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강태수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1962년에는 일제 현금 수송 차량을 털었던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린 고려인 최초의 장편소설 <십오만원 사건>(김준 작)이 발표돼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또한 작가 김세일의 시 <내고향 원동을 자랑하노라>와 역사소설 <홍범도>가 발표됐던 시기 역시 이즈음이었다.

1970년, 고려인 문학은 마침내 카자흐스탄 작가동맹 산하의 공식 조직으로 인정됐다. 연해주에서 발아한 씨앗이 30여년을 자라 중앙아시아에서 열매 맺게 된 것. 그로부터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던 19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가량 고려인 문학은 최대 성숙기를 구가한다. 작가의 경력이 함께 소개된 작품집 《시월의 햇빛》과 《씨르다리야의 곡조》 《그대와 말하노라》 《해바라기》 《행복의 노래》 등이 잇따라 출간됐고, 김준 시집 《그대와 말하노라》(1977), 연성용 종합작품집 《행복의 노래》(1983) 등도 이 시기에 출간됐다.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 이후에도 한동안 고려인 문학은 김광현 종합작품집 《싹》(1986)과 김기철 소설집 《붉은 별들이 보이던 때》(1987) 《한진희곡집》(1988), 리진 시집 《해돌이》(1989)을 출간하며 1920년대 말 태동한 고려인 문학사의 정점을 찍어갔다. (글=조철현 기록문학가)

1.김준 장편소설집《십오만 원 사건》<1964년>
2.연성용 종합 작품집《행복의 노래》<1983년>
3.김광현 홍합 작품집《싹》<1986년>
4.김기철 소설집《붉은 별들이 보이던 때》<1987년>
5.한진 희곡집》<1988년>
6.리진 시집《해돌이》<1989년>